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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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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엔 없는 자유의 좋은 점 ‘열심히 하면 성공’”

Writer. 관리자   /   Data. 2017-03-22   /   Hit. 2738

“북한엔 없는 자유의 좋은 점 ‘열심히 하면 성공’”

탈북민 출신 여성 박사 1호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장

 

탈북민 출신 여성 박사 1호. 화려한 타이틀의 주인공 이애란(52) 자유통일문화원장은 정작 스스로를 ‘빚진 자’라고 표현한다. 남한에 정착해 원하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던 덕분이란 뜻에서다. 그는 “탈북민들도 열심히만 하면 어떤 것이든 이룰 수 있다”면서 “그게 북한에는 없는 자유의 가장 좋은 점 아니겠냐”고 말한다. 그의 삶은 빚을 갚는 여정인 듯 보였다.

 

1997년 탈북한 이 원장은 남한에 오기 전 북한 신의주대학 식품발효학과를 졸업하고 북한과학기술위원회 품질감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소위 잘나가던 그는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미국에 살던 조카가 쓴 책이 현지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책 안에 이 원장의 부친이 북한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겼던 것.

 

갓난아기를 업고 탈출해 두 달 만에 남한 땅을 밟았다. 그는 최초의 탈북민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80만 원이던 월급을 2700만 원까지 올리기도 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니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북한웰빙음식점이었다. 식당의 주 메뉴는 토끼고기였다. 북한에선 토끼가 심장에 좋다고 알려져 고급 웰빙 음식으로 통한다. 자신의 치료 경험을 살려 이 원장은 특허까지 출원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겐 낯선 음식이었다. 식당은 잘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화여대 학생이 탈북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며 이 원장을 찾아왔다. 이것이 계기가 돼 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됐는데, 그때 그를 알아본 식품영양학과 이종미 교수가 장학금을 줄 테니 대학원에 다녀보라고 제안했다.

 

 

출신성분 나빠 북한서 대학도 못 들어갈 위기 겪어

생계와 학업 병행하며 남한서 7년 만에 박사학위 취득

 

그토록 원하던 공부였다. 이 원장은 어린 시절 ‘네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출신성분이 나빠 대학엔 갈 수 없다’는 선생님의 꾸지람을 듣고 자살 시도까지 했다. 조부모가 월남해 온 가족이 변두리로 추방당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법이 바뀐 덕에 대학 공부를 마칠 수 있었던 그에게 이 교수의 제안은 두 번째 맞은 일생의 기회였다. 그는 식당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잊었던 꿈에 테두리를 그려나갔다.

 

“공부를 해서 뭘 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다만 저에게도 기회를 주신 것이 무척 감사했죠. 일단 장학금을 받고 나서는 무조건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 때문에 누군가는 장학금을 못 받은 거잖아요. 빚을 갚는 길은 그뿐이었죠.”

 

학교에선 석사과정이 끝난 뒤 박사과정마저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육아와 생계, 학업을 병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학비는 문제가 없었지만, 연구비와 논문 제작비 500만 원이 모자라 카드빚까지 내야 했다. 식당을 그만두고 회사를 다니며 공부할 땐 너무 힘들어 우울증까지 앓았다. 그렇게 자신과 사투를 벌이길 7년. 이 원장은 ‘1990년 전후 북한 주민의 식생활 변화’라는 논문으로 2009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언론에선 최초의 여성 탈북자 박사라고 치켜세우는데 사실 무척 부담스러워요. 이게 저 혼자 힘으로 한 게 아니잖아요. 여전히 저는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탈북민들이 처음에 오면 힘들겠지만, 열심히 살다 보면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그러면서 길이 열릴 거예요. 우리도 그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죠.”

 

이 원장은 자신이 진 빚을 또 다른 탈북민들을 도우며 갚고 있다. 그는 학업을 마친 뒤에 자유통일문화원의 전신인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탈북 여성들에게 북한 전통음식을 주제로 무료로 직업훈련을 시켜주고, 그들을 통해 국내에 북한 전통음식을 보급하는 게 목적이다. 이와 연계한 북한 전통음식 전문 식당을 내고 관련 서적도 출간했다. 또한 ‘통일은 밥상으로부터’라는 모토로 ‘이애란 통일 약과’ 등을 만들어 북한 주민들에게 보내는 ‘내 가족 지원 방북 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북한 측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북한과 남한의 가장 큰 차이는 문화예요. 문화가 달라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돼가고 있어요. 음식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수단 중 하나죠. 남한 사람들이 북한 음식을 먹어보면서 북한에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한편 북한의 핵실험보다 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사람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고 쉽게 죽이는 북한 정권의 행태예요. 기아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을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현재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은 자유통일문화원으로 이름을 바꿔 탈북자를 돕는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최근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건 탈북 대학생 교육이다. 장학금을 주고 영어와 역사를 가르친다. 이 원장은 특히 북한에서 온 대학생들에게 자유시장경제체제를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민주주의로 가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핵보다 무서운 건 북한폭압정권…북한 주민에 관심 가져야”

음식 통해 남북 교류 지원 등 다양한 사업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날 통일 비용만 운운합니다. 그러나 통일 이전에 진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찾아주는 거죠. 20년 동안 남한에 살며 느낀 것은 민주주의는 자유시장경제체제 아래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겁니다. 올해 스무 살이 된 탈북민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려주니 ‘피가 끓는다’고 하더군요. 피가 끓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고통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이 원장은 역경을 이겨낸 의지와 탈북자들의 정착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미 국부부가 주는 ‘용기 있는 국제 여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미 국무부가 매년 여성 인권과 정의 실현에 공로가 큰 전 세계 여성 지도자들을 뽑아 수여하는 상이다. 당시 그는 수상 소감으로 “내 영광이 북한 주민들에게 닿기를”이라고 전했다.

 

갓 돌이 지날 무렵 엄마의 손을 잡고 북녘 땅을 넘어온 이 원장의 아들은 올해 스무 살이 됐다. 역사 교사가 되겠다는 아들을 보며 그는 모든 탈북민이 자신의 아들처럼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꿈꾸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모든 탈북민들에게 남한은 어려운 땅입니다. 적응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면 기회를 주는 곳이기도 하죠. 탈북민도 신뢰를 줘야 합니다. 서로가 믿고 도우며 사는 게 통일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길을 만들 거라 믿습니다.”

 

[위클리공감]

 

기사 원문보기 : http://www.korea.kr/policy/societyView.do?newsId=148823752&call_from=rss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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